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맥스웰 테일러 (문단 편집) === 1960년대: 합참의장 === '''하지만 그는 다시 군과 공직으로, 더 높은 직위로 복귀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이후 [[피그만 침공]]이 실패로 끝나자 새 [[합동참모의장]] 인선에 나서서 마땅한 현역이 없길래 그냥 퇴역한 테일러 장군을 다시 불러서 현역 복귀시킨 뒤 합참의장에 임명해버렸다. 케네디는 민주당 대선후보 이전 시절부터 아이크 행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비판하며 테일러와 뜻을 같이 하였던 인물이라 그리 이상할 것은 없었다. 특히 [[로버트 F. 케네디]]와 친해져서 RFK가 아들의 이름을 매튜 '''맥스웰 테일러''' 케네디라고 짓기도 했다. 합참의장 재임 시절, 소련의 군사위협에 맞서기 위한 방위 전략으로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 전략을 제시했다. 소련의 재래식 전쟁 도발에 시작부터 핵무기로 대응하는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의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 전략이 지나치게 핵무기에 의존적이라는 비판을 전제로, 초기 대응에서 재래식 군사력의 역할을 좀 더 강조하면서, 여의치 않을 경우 핵무기를 동원하는 단계별 대응에 나선다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유연반응전략도 전쟁 억지에서 재래식 군사력보다 핵무기의 비중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 증거로 미군이 유연반응전략을 추구했던 1960년대 당시, 서유럽에 배치된 미군의 전술핵무기는 2천 개에서 7천 개까지 증가했다. 결국 이러한 핵무기의 과도한 의존은 1980년대 [[공지전]]이 등장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파일:external/www.talkingproud.us/jfk-2.jpg]]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로버트 맥나마라]](왼쪽) 국방장관, 케네디(오른쪽) 대통령과 함께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는 미 군부의 대표적 강경론자인 [[커티스 르메이]] 공군참모총장과 함께, [[쿠바]] 공습을 주장했다. 또한 남베트남의 쿠데타와 [[응오딘지엠]]의 하야와 처형 등의 여러 현안으로 전운이 돌던 1960년 초중반에 대통령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합참의장으로서 적절한 조언을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응오딘지엠의 하야를 부른 군부 쿠데타에다 8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 당시 일련의 행동들은 1997년 [[H.R. 맥마스터]] 육군 [[소령]][* 2017년 상반기 현재 계급은 중장으로, 현재 백악관 안보담당보좌관이다. 21세기에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등과 관련하여 미 육군 내에서 가장 핫한 인물 중 하나로 꼽혀서 백악관에 중용되고 이후 여러 중요 대장 보직에의 내정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인 국방정책에 직언하다가 트럼프에게 감히 도전한다고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지만, ~~이후 트럼프가 직접 거취를 보장할 것이라고 밝혀 위기를 넘겼다~~ 결국 즉흥적으로(?) 2018년 3월 해임됐다.]이 발간한 서적 <직무유기(Dereliction of Duty)>에서 통렬한 비판을 받는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었던 [[커티스 르메이|석기시대 매니아]] 장군의 행보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